한대수 (韩大洙)

한대수 (韩大洙)

- from http://www.hahndaesoo.co.kr.... 简介:출생 1948년 03월 12일 / 대한민국 종교 기독교 학력 -부산 경남중학교 졸업 -부산 경남고등학교 수료 -미국 A.G. Berner 고등학교 졸업 -미국 뉴 햄프셔 주립대학교 수의과대학 수료 -미국 뉴 욕 사진전문학교 졸업 프로필 1969년 이화여자 대학교,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 드라마 센터 공연 1970년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디자이너(3급 공무원)로 근무 1971-74년 군복무(해군 149기) 1974년 코리아 헤럴드 신문 기자 겸 사진작가 1977년 뉴욕시 Color Wheel, Chroma Copy의 사진작가 활동, 락 밴드 "Genghis Khan"의 리더로서 클럽 Trude Heller, CBGB's 등에서 공연 1988년 L.A.로 이주. Color House, Burbank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91년 뉴욕으로 이주. Nathaniel Lieberman studio, architectural 활동 1993년 Speed Graphics사 매니저 활동 1997년 Crossbeat Asia의 후원 하에 일본의 락스타 Carmen Maki와 함께 일본 공연 및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유니텔 락 콘서트 "Koreanism" 공연 1999년 양희은의 "아주 특별한 만남" 공연(5.5-9, 영산 아트홀)에서 고정게스트로 공연 2000년 SBS 포크 페스티발(5.27-28, 올림픽 공원 잔디마당)에 양일간 참가한 대수는 우리 대중음악계 최초의 싱어 송라이터로 1960년대 말 미국 히피 문화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이 땅에 청년문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열여덟에 만든 [행복의 나라]를 필두로 포크, 록, 재즈, 전위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천재 뮤지션으로 70년대 초 발표한 앨범 두 장이 모두 금지곡으로 묶이자 미국에 건너가 틈틈이 음악활동을 하다 90년대 후반, 국내활동을 재개했다. 한대수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해 본 적 없고,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해 본 적도 없다. 굳이 음악과의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클래식에 심취한 할아버지와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늘 클래식을 듣고 자라 10대에 베토벤의 교향곡을 휘파람으로 불고 다닐 정도였다는 것. 그렇게 잠재되어 있던 음악적 감성들이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지난한 인생사를 타고 깨어남으로써 한대수의 음악은 탄생하게 된다. 한대수는 부유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실종에 이은 어머니와의 이별 등을 겪은 후 열 살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다시 돌아와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배워 친구들과 '바나나 보이스'란 밴드를 만들어 활동을 하던 그가 이 땅을 다시 밟게 되는 것은 1968년의 일. 히피 열풍이 미국을 휩쓸고 있을 무렵이다. 그는 대학가를 돌며 노래를 시작해,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이름을 알리며 활동을 계속하던 중 군에 입대한다. 제대할 무렵 그는 자신이 만든 곡들 - 김민기가 부른 [바람과 나], 양희은이 부른 [행복의 나라] - 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얻자 이에 힘입어 1974년 「멀고 먼 길」이라는 첫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은 [물 좀 주소]라는 당대 최고의 포크 곡으로 큰 화제를 모았는데 트로트 가요 일색이었던 당시의 가요계는 이 같은 장발의 낯선 이방인에게서 흘러나오는 낯선 음악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던 중 1975년 그의 두 번째 앨범 「고무신」이 완성되었으나 이 앨범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 있는 표지 사진이 문제가 되어 발매도 되기 전에 해당기관으로부터 압수를 당했으며 더불어 1집까지도 판매금지 처분을 받고 만다. 이처럼 자신의 양 날개가 꺾이자 한대수는 주저 없이 이 땅을 떠나게 된다. 1976년 미국에 정착한 그는 뉴욕에서 사진작가와 시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칭기즈칸'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음악활동을 계속한다. 과거를 반복하는 음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그의 소신대로 그는 이 땅을 떠난 지 십여 년 후 잠시 귀국해 록큰롤을 위주로 한 「무한대」(1989)를, 1990년에는 뉴욕에 온 양희은의 도움을 받아 재즈, 전위음악을 시도한 4집「기억상실」을, 1991년에는 피아니스트 이우창과 함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5집「천사들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다양한 음악 장르들을 차례로 아우르는 저력을 보여준다. 그의 이름이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다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97년 일본 후쿠오카에서의 공연 크로스비트 아시아(Crossbeat Asia)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부터. 뛰어난 음악인으로서의 그의 존재를 미리 알아보지 못한 우리 대중음악계에 자성의 분위기까지 이끌어냈던 후쿠오카의 공연 실황은 1999년「1975 고무신~1997 후쿠오카」에 담겨 소개되었고 같은 해 미국의 한인 독지가가 한대수를 위해 설립한 인디 레이블 '감미 레코드'를 통해 정통 하드 록을 담은 7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도 발표된다. 이 앨범에서 그는 마음의 에이즈를 앓는 사람을 그린 [에이즈 송], 러시아의 한국계 가수 고 빅토르 최의 [핏줄]을 리메이크 한 [블러드] 등을 통해 60년대 당시의 록과 펑크 정신을 되살려내고 있다. 이어 국내에서의 앨범 발매를 모색하던 그는 2000년 후배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손무현이 제작을 맡은 8집 「Eternal Sorrow」을 통해 하드 록, 펑크, 디스코, 포크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을 한 장의 앨범 안에 구현해냈다. '여러분, 제가 병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섭습니다'로 시작되는 기이한 독백과 음울한 웃음소리가 담긴 인트로가 인상적인 이 앨범에는 손무현, 린애, 함춘호와 같은 쟁쟁한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해 신·구의 조화를 이뤘다. 2001년 한대수는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의 공연 이후 32년만에 솔로공연 'The Last Concert'를 가지면서 젊은 세대들과의 교류에 희망을 갖게 되었으며 2002년에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영구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2002년, 그는 기타리스트 김도균, 재즈 피아니스트 이우창과 함께 '삼총사'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 그의 9집 앨범 「고민」에서 한대수식 랩을 선보인 [호치민], 그의 열린 시각을 보여주는 [마리화나]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자유를 향해 끝없는 유랑을 계속하는 한대수. 록의 호흡을 바탕으로 선과 악, 인간의 존재와 세상사를 걸걸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는 그가 꿈꾸는 사랑과 평화, 자유로 충만한 세상이 오는 그 날까지 끝없는 실험을 계속할 것이다. Hahn Dae-Soo has long felt that "where you live is not as important as what you are." Born and raised in Korea, this young singer/composer now reflects that his music may have been the spark that ignited the contemporary music movement in his homeland. Hahn, who left Korea in the late '70's for the USA, notes the changing times and tunes in his country. "There's a growing vitality and acceptance of pop and rock music in Korea....and a lot of great musicians are ready to make this movement a reality." His own songs were, and still are, reality on the changing Korean scene. Hahn's "One Day," "Wind And I" and "Last Dream," in concert and on record, have raised the pop music consciousness of college students throughout Korea. "Open up those windows / Let's awaken the world / With your narrow eyes / To the Land of Happiness / We shall march," the lyrics of a Hahn song, has become a campus anthem for young Koreans who are building a new nation. It's an anthem that could only spring from the talents of this unique singer/composer.... made from the mix of Korean and American cultures and alive with the special harmony of today's Pacific basin beat. Hahn acknowledges this when he refers to himself as a "cultural mixed breed." And his songs still echo with a deep love of his homeland and his desire to "heal the wounds through music." His songs do exactly that with their regard for the old and their special feeling for the new. Influenced by many of American Pop/Rock musicians, Hahn Dae-Soo can see the changes that are now sweeping the Asiatic/Pacific nations. It's a new wind, a time for new music.... music that he has now brought to the USA with the hope that it will also be heard by the youth everywhere as it i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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